2011년 9월, 우리 가족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필리핀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의 안정적이었던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이 먼 타국까지 건너온 이유는 단 하나, 온라인 화상 영어 사업이라는 새로운 꿈을 펼쳐보기 위해서였다. 낯선 공기와 뜨거운 햇살마저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던 설레는 시작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상상보다 훨씬 높고 차가웠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니 예상치 못한 난관들이 속속 드러났다. 필리핀의 살인적인 전기료와 상상을 초월하는 건물의 임대료는 이제 막 발을 내려는 내 의지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자본금은 한정되어 있었고, 무리하게 시작했다가는 가족 전체가 위태로워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결국 나는 꿈꿨던 사업 계획을 잠시 접고, 일단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가장이 주춤하는 사이, 아내가 먼저 용기를 냈다. 현지에서 면접을 보러 다니던 아내는 다행히 보니파시오(BGC)에 위치한 직장에 합격했고, 2011년 12월 트레이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출근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내의 출퇴근길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투였다.
아침 출근길에는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탔지만, 퇴근길은 상황이 달랐다. 아내는 보니파시오 마켓 마켓(Market! Market!) 앞 지프니 정류장에서 기본 한 시간 반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간신히 지프니에 몸을 싣고 파식(Pasig) 재래시장에 내리면 끝이 아니었다. 다시 트라이시클 정류장으로 가서 줄을 서고, 낡은 오토바이에 모르는 사람들과 뒤섞여 일곱 명이 꽉 차야만 출발하는 '레귤러' 트라이시클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밤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아내를 보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야속하게 흘러갔다.
아내가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집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며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적응해 나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사리사리 스토어(Sari-sari store)가 보였고, 그 앞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두 병에 길거리 바베큐를 곁들이며 현지인들과 어울렸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래,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이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착한 지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아이들이 곤히 낮잠을 자고 있던 고요한 오후, 나는 혼자 뒷마당으로 나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참아왔던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더니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정말 이러려고 한국 생활 다 정리하고 여기 온 건가?"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더 멋진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호기롭게 큰소리치며 넘어왔는데, 정작 내 아내는 저 멀리 보니파시오까지 험난한 길을 오가며 고생하고 있었다. 가장인 나는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 맥주나 마시며 평화로운 척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 위선적이고 한탄스러웠다. 아내의 고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지금 행복하다'고 자위했던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워졌다.
한참을 울고 나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거창한 사업을 다시 일으 세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내 아내의 고단한 출퇴근길만큼은 내가 해결해 주어야 했다. 뙤약볕 아래서 하염없이 지프니를 기다리고, 비좁은 트라이시클에 끼여 먼지를 마시는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고민했다.
"안 되겠다. 오토바이라도 사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 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내를 직접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그 힘든 시간을 함께 나누겠다는 결심. 그것은 필리핀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우리 가족이라는 배를 다시 항해하게 만들 나의 첫 번째 엔진이었다.
그날 뒤뜰에서 흘린 눈물은 나약했던 나를 깨우는 죽비 소리였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꼈던 다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가족의 진짜 필리핀 정착기, 그 위대한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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